북노트

협상은 책상에서 이긴다

협상의 승부는 테이블에서 나지 않습니다. 그 전날 밤, 책상에서 이미 갈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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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은 책상에서 이긴다

작년 봄, 정원이 한 자리 빈 날이었습니다. 어머니 한 분이 상담을 오셨습니다. 저는 준비랄 게 없었습니다. 그냥 자리에 앉아, 그 자리에서 즉흥으로 대응했지요. "조금 비싸네요"라는 말이 나오자 저도 모르게 입에서 "그럼 이번 달은 등록비를 빼드릴게요"가 튀어나왔습니다. 어머니는 잠깐 생각하더니 등록을 하셨습니다. 그날 밤 저는 묘하게 찜찜했습니다. 등록은 받았는데, 제가 뭘 내준 건지, 왜 그 금액이었는지, 저조차 설명할 수 없었으니까요.

저는 그게 제 순발력 부족인 줄 알았습니다. 더 빨리, 더 매끄럽게 받아쳤어야 한다고요. 한참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상담실에서의 1초가 아니라, 상담실에 들어가기 전 제 책상이 텅 비어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책에서 제가 건진 건 딱 세 가지입니다. 원장님께 그것만, 대신 제대로 전합니다.

서양 협상서를 한국 실무 '한 장'으로 번역한 책

류재언. 기업 분쟁과 계약 협상을 전문으로 다루는 변호사입니다. 하버드 로스쿨의 협상 프로그램을 수료했고, 삼성전자·스타벅스 같은 기업에서 협상을 강의해 왔습니다.

협상을 공부하려고 책을 뒤지다 보면 벽을 만납니다. 좋은 책은 대부분 서양 것이고, 사례는 M&A나 외교 무대입니다. 읽고 나면 고개는 끄덕여지는데, 정작 내일 아침 상담실에서 뭘 해야 할지는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이 책의 한 수가 거기 있습니다. 저자는 흩어진 협상학 이론 열두 가지를 'NPS'라는 준비 시트 한 장으로 묶었습니다. 목표·욕구·기준·대안·배트나 같은 키워드를, 협상 전날 책상에서 직접 채워 넣는 빈칸으로 만든 겁니다.

그러니까 이 책은, 협상을 '말 잘하는 기술'이 아니라 **'미리 작성하는 한 장의 준비표'**로 바꾼 책입니다. 시험으로 치면 이렇습니다. 시험을 잘 보는 학생은 시험장에서 머리가 빨리 돌아가는 학생이 아닙니다. 시험 전날, 오답노트를 펴고 "이 유형이 나오면 이렇게 푼다"를 미리 정리해 둔 학생입니다. 시험장에 들어설 땐 이미 절반은 끝나 있지요. 저자가 말하는 협상도 똑같습니다. 테이블에서 즉흥으로 이기는 게 아니라, 책상에서 준비표로 미리 이깁니다.

원장이 건질 수 있는 것 (세 가지)

1. 협상력의 80퍼센트는 책상에서 만들어집니다

저자가 단호하게 말하는 비율이 하나 있습니다. 협상의 성패는 준비 80, 테이블 20으로 갈린다고요. 협상장에서 벌어지는 일은 책상에서 준비한 것의 결과일 뿐이라는 겁니다.

이걸 시험 준비에 빗대면 분명해집니다. 시험 점수의 대부분은 시험지를 받기 전에 정해져 있습니다. 시험장에서 아무리 집중해도, 안 풀어본 유형은 그 자리에서 갑자기 풀리지 않습니다. 상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그날 즉흥으로 등록비를 깎은 건, 책상에서 "수강료 말이 나오면 나는 무엇을, 어떤 조건으로 내줄 수 있는가"를 단 한 번도 적어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당장 해볼 수 있습니다. 다음 상담 전날, A4 한 장을 꺼내 맨 위에 딱 한 줄만 적어두세요. "이 상담에서 내가 절대 양보하지 않을 것 한 가지, 양보할 수 있는 것 두 가지." 이 세 줄만 미리 정해도, 상담실에서 "깎아주세요"라는 말이 나왔을 때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이 달라집니다.

2. 깎아주기 전에, 상대의 '진짜 원하는 것'을 칸에 적으세요

저자가 준비 시트에 반드시 넣으라는 칸이 '욕구'입니다. 상대가 입으로 말하는 '요구'(예: "비싸요")는 빙산의 일각이고, 그 아래 진짜 '욕구'가 따로 있다는 겁니다.

손정의가 애플의 스티브 잡스와 협상한 일화가 나옵니다. 손정의는 잡스가 겉으로 말한 조건이 아니라, 잡스가 속으로 안고 있던 골칫거리를 정확히 건드렸습니다. 그 디테일이 무엇이었는지는 책에서 직접 확인하시는 게 좋습니다. 핵심은 이겁니다. 그는 그걸 테이블에서 즉흥으로 알아챈 게 아니라, 미리 상대의 욕구를 헤아려 준비해 갔다는 점입니다.

상담 준비표에 칸을 하나 더 그으세요. "이 어머니가 입으로 말하는 것"과 "이 어머니가 진짜 불안해하는 것"을 나란히 적는 칸입니다. "비싸요"라는 말 밑에는 보통 "이 돈을 쓸 만큼 정말 효과가 있을까"라는 불안이 깔려 있습니다. 그 칸을 미리 채워 가면, 상담실에서 가격을 깎는 대신 그 불안을 풀어주는 말을 꺼내게 됩니다.

3. '안 되면 어쩌지'의 답을 미리 적어두면, 표정이 바뀝니다

저자가 협상력의 핵심으로 꼽는 칸이 '배트나'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 협상이 깨지면 나에게 남는 차선책"입니다. 이게 책상에 적혀 있느냐 아니냐가 협상장에서의 태도를 가른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이것도 시험과 같습니다. "이 문제를 못 풀면 어떡하지"라는 공포는, 못 푸는 문제를 만났을 때 옆 문제까지 망치게 합니다. 그런데 "안 풀리면 일단 넘기고 뒤에서 점수를 채운다"는 차선책을 미리 정해둔 학생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상담도 같습니다. "이 한 자리를 못 채우면 끝장"이라고 느끼면 표정에 절박함이 새어 나오고, 그 순간 끌려갑니다.

준비표 맨 아래에 한 줄을 적으세요. "이 학생이 등록 안 해도, 이번 달 나의 차선책은 ◯◯◯다." 빈칸을 채우는 순간 신기하게도 어깨에 힘이 빠집니다. 차선책이 적혀 있는 사람은 매달리지 않고, 매달리지 않는 사람이 더 좋은 조건을 얻습니다.

단, 이 책을 덮어야 할 원장도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립니다. 이 책은 변호사가 쓴 책이라, 사례가 기업 분쟁·계약·M&A 쪽으로 기울어 있습니다. 학원 상담이라는 작고 정서적인 협상에 그대로 옮기려면, 원장님이 한 번 번역하는 수고가 필요합니다. 표를 채우는 일이 체질에 안 맞고 "그냥 사람 대 사람으로 대화하고 싶다"는 분께는, 이 책의 시트가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양식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 책은 '준비'에 강하지만, 막상 테이블에서 상대의 감정이 격해졌을 때 그 자리에서 어떻게 마음을 다루느냐는 상대적으로 얇습니다. 그 부분은 다른 책이 더 깊습니다. 이 책은 준비표를 쥐여주는 책이지, 실시간 대응 매뉴얼은 아닙니다.

읽고 나면 달라지는 한 줄 — 앤디의 렌즈

저는 이렇게 읽습니다. 우리는 상담이 안 풀릴 때 늘 무언가를 '더하려' 합니다. 그 자리에서 혜택을 더하고, 말을 더하고, 깎아주기를 더하지요. 다 즉흥입니다. 그런데 이 책은 정반대를 말합니다. 더하기 전에, 그 전날 책상에서 한 장을 채워두라고. 즉흥의 반대말은 순발력이 아니라 준비입니다.

협상의 승부는 테이블에서 나지 않습니다. 그 전날 밤, 책상에서 이미 갈립니다.

이번 주에 딱 하나만 해보십시오. 다음 상담 전날, A4 한 장에 세 칸을 그어두는 겁니다. "내가 안 내줄 것 하나 / 이 어머니의 진짜 불안 하나 / 등록이 깨져도 나의 차선책 하나." 이 한 장이, 같은 상담의 결과를 바꿉니다.


류재언 협상 바이블 — 류재언 변호사의 협상 바이블
류재언 저
한스미디어 · 2018

"협상의 승부는 테이블에서 나지 않습니다. 그 전날 밤, 책상에서 이미 갈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