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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노트독서노트2026.06.169분 읽기

. 좋은 결정을 막는 진흙탕 같은 번거로움입니다. 구독은 한 번에 되는데 해지는 전화로만 받는 회사, 그게 슬러지입니다. 그런데 학원에도 슬러지가 있습니다. 등록은 복잡한 서류에 남편 상의까지 거쳐야 하고, 정작 그만두기는 문자 한 통이면 되는 구조. 저는 좋은 결정 쪽에 진흙탕을 깔아두고 학부모의 의지를 탓하고 있었던 겁니다.

상담 테이블 위에 동의서 한 장이 놓여 있었습니다. 학부모는 다 듣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좋네요, 한번 시켜볼게요." 그런데 펜을 들지 않았습니다.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며 "집에 가서 남편이랑 상의하고 연락드릴게요"라고 했습니다. 그 학부모는 다시 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이 장면을 제 설명이 부족한 탓으로 읽었습니다. 더 설득력 있게 말했어야 했나, 혜택을 더 강조했어야 했나. 그래서 상담 멘트를 다듬고 또 다듬었습니다. 그런데도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일이 반복됐습니다. 말을 잘하는 날에도 그랬습니다.

리처드 탈러와 캐스 선스타인의 『넛지』를 집어 든 건 그 답답함 때문이었습니다. 행동경제학 책이라기에 저는 "사람을 어떻게 더 잘 설득하는가"가 적혀 있을 거라 기대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더 교묘한 설득 기술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책이 처음부터 제 기대를 비틀었습니다.

탈러가 말하는 건 설득이 아니었습니다. 환경이었습니다.

이 책의 출발점은 한 문장으로 요약됩니다. 사람은 합리적으로 계산하는 '이콘'이 아니라, 편향과 게으름을 가진 '인간'이다. 그리고 인간이 선택하는 환경, 그러니까 '선택 설계'는 결코 중립일 수 없다. 동의서를 테이블 위에 놓느냐 가방 속에 넣게 하느냐, 펜을 쥐여주느냐 마느냐. 이 사소한 차이가 결과를 가른다는 것입니다. 탈러는 이것을 넛지라고 불렀습니다. 강요하지 않고, 경제적 이득도 바꾸지 않으면서, 사람의 행동을 예측 가능한 방향으로 부드럽게 미는 것.

여기서 저는 한 대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제가 그동안 학부모의 '의지'를 설득하려 했다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바꾸려 했지, 환경을 바꿀 생각은 못 했습니다. "집에 가서 상의할게요"는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결정을 지금 여기서 내리기 어렵게 만든 환경, 그 환경을 제가 그대로 둔 탓이었습니다.

탈러가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학자라는 사실이, 이 책에서는 묘하게 작동합니다. 그는 사람을 똑똑하게 만들려 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게으르고 편향됐다는 걸 인정하고, 그 게으름을 거스르는 대신 게으름의 방향을 설계합니다. 카너먼의 『생각에 관한 생각』이 "인간은 이렇게 틀린다"를 밝힌 진단서라면, 『넛지』는 "그러니 환경을 이렇게 짜라"는 처방전입니다. 카너먼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면, 탈러는 그 불편함을 들고 무엇을 할지 알려줍니다. 같은 독자가 두 책을 이어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 책에서 원장에게 가장 날카롭게 닿는 개념을 하나 꼽으라면 저는 디폴트, 기본값입니다. 탈러는 연금 자동 가입 사례를 듭니다. 가입 여부를 직접 고르게 하면 절반도 안 드는데, 자동으로 가입시키고 빼고 싶으면 빼라고 하면 가입률이 90퍼센트를 넘깁니다. 같은 사람들, 같은 혜택, 바뀐 건 기본값 하나뿐입니다. 사람은 대부분 기본값을 그냥 둡니다. 의지로 선택하는 게 아니라, 차려진 대로 먹습니다.

이 대목에서 제 15년이 보였습니다. 잘 되는 학원과 그렇지 않은 학원의 차이는 원장의 열정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두면 어떻게 되는가'를 설계해 둔 곳과, 매번 학부모의 결심에 기대는 곳의 차이였습니다. 재등록을 예로 들면, 어떤 학원은 다음 달 등록이 기본값입니다. 그만두려면 말씀하셔야 합니다. 어떤 학원은 매달 다시 결심을 받습니다. 두 곳의 리텐션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학부모가 더 의리 있어서가 아니라, 결정을 미루기 쉬운 쪽으로 환경이 짜여 있어서입니다.

그러니 다시 그 상담 테이블로 돌아가면, 제가 해야 했던 건 더 좋은 멘트가 아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결정이 일어나도록 마찰을 없애는 일이었습니다. 탈러는 이 마찰에 이름까지 붙였습니다. 슬러지. 좋은 결정을 막는 진흙탕 같은 번거로움입니다. 구독은 한 번에 되는데 해지는 전화로만 받는 회사, 그게 슬러지입니다. 그런데 학원에도 슬러지가 있습니다. 등록은 복잡한 서류에 남편 상의까지 거쳐야 하고, 정작 그만두기는 문자 한 통이면 되는 구조. 저는 좋은 결정 쪽에 진흙탕을 깔아두고 학부모의 의지를 탓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 책에는 '미래의 나에게 약속하게 하라'는 저축 설계나, 사회적 증거를 환경에 심는 법, 넛지가 윤리적으로 어디서 멈춰야 하는가 하는 묵직한 장들도 있습니다. 탈러는 넛지가 만능이 아니라는 점도 솔직하게 인정합니다. 진짜 해로운 행동에는 부드러운 떠밀기가 아니라 세금이나 금지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자기 이론의 한계를 스스로 긋는 학자의 정직함이 이 책을 신뢰하게 만듭니다. 그 부분은 각자의 현장에서 읽으면 보입니다.

저는 이 책을 덮고 나서 상담 멘트 파일을 닫았습니다. 대신 동의서를 어디에 두는지, 펜을 어떻게 건네는지, 결정을 다음으로 미루기 쉽게 만드는 문장이 제 상담 어디에 숨어 있는지를 들여다봤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등록한다"가 아니었습니다. 등록하기 쉬운 자리에 앉혀드리는 일이 제 몫이었습니다. 의지를 설득하던 사람이, 환경을 설계하는 사람으로 바뀐 날이었습니다.


넛지 (파이널 에디션) / Nudge: The Final Edition / 리처드 탈러·캐스 선스타인 저 / Penguin /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