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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노트북노트2026.06.169분 읽기

결과만 보면 등록은 다 같은 등록인데, 왜 그 학부모가 마음을 정했는지를 파고들면 한 명도 같지 않았습니다.

와튼 비즈니스스쿨에는 30년 넘게 임원들을 줄 세우는 협상 워크숍이 하나 있습니다. 그 강의의 학술 디렉터가 쓴 교과서를 펼치면, 첫 장부터 우리가 협상에 대해 믿는 가장 흔한 한 가지를 부숩니다. "이기는 협상의 공식 같은 건 없다." 저자 리처드 셸은 자신을 협상학의 '회의주의 학파'라고 부릅니다. 윈윈이든 윈루즈든, 어떤 만능 전략을 외워 모든 협상에 들이미는 순간 진다는 겁니다. 미국 최고 경영대 교수로 세 번 선정된 사람이 학생들에게 처음 가르치는 게 "정답은 없다"라니, 저는 이 대목에서 책을 잠깐 덮었습니다.

제가 이 책을 집은 이유는 사실 좀 옹졸했습니다. 협상서를 세 권 연달아 읽고 있었는데, 류재언의 실무 원칙도, 하버드의 원칙협상도, 허브 코헨의 힘·시간·정보도, 읽을 때는 다 맞는 말 같은데 상담실에 들어가면 미끄러졌기 때문입니다. 같은 멘트가 어떤 학부모에겐 마법처럼 통하고, 어떤 학부모에겐 역효과가 났습니다. 저는 그게 제 실력 문제, 그날의 컨디션 문제라고 오래 믿었습니다. 네 번째 책에서는 그 변덕을 끝낼 '최종 정답'을 찾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셸이 준 건 정답이 아니라, 제가 왜 정답을 찾으면 안 되는지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이 책의 골격은 '6가지 토대'와 '4단계 프로세스'입니다. 협상 묶음을 읽은 분이라면 이름이 익숙한 개념들이 보입니다. 앵커링, 양보, BATNA, 상대의 이해관계. 셸이 다른 세 권과 갈라지는 지점은 이 익숙한 부품들을 하나의 진단 체계로 묶었다는 것입니다. 코헨이 일화로 직관을 던지고 하버드가 원칙을 세웠다면, 셸은 사회심리학자 치알디니의 연구를 협상 테이블로 끌고 와 "당신이라는 사람과 지금 이 상황을 먼저 진단하라"고 말합니다. 전략은 그다음에 고르는 겁니다.

특히 한 수가 작가도 흐뭇할 만큼 날카롭습니다. 셸은 협상 스타일을 다섯으로 나눕니다. 회피, 순응, 타협, 경쟁, 협력. 그런데 그가 정작 강조하는 건 "어떤 스타일이 정답이냐"가 아니라 **"트릭을 부리지 말고 자기답게 협상하라"**입니다. 경쟁형인 사람이 책에서 본 협력형 멘트를 외워 쓰면 어색해서 들통난다는 겁니다. 와튼 표준 교과서를 쓴 사람이 "내 책에 나온 기술을 그대로 베끼지 말라"고 적어둔 셈입니다. 효과적 협상은 10퍼센트의 기술과 90퍼센트의 태도라는 그의 문장이, 이 대목에서 비로소 무게를 가집니다.

여기서 제 오래된 자책이 풀렸습니다. 같은 멘트가 누구에겐 통하고 누구에겐 안 먹힌 건, 제 실력이 들쭉날쭉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학부모가 서 있는 상황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셸의 시그니처인 '상황 매트릭스'는 이걸 두 축으로 그립니다.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가, 그리고 이해가 얼마나 충돌하는가. 두 축을 교차하면 네 칸이 나옵니다. 집·차를 사고파는 '거래' 상황에선 경쟁이 맞고, 결혼이나 팀 같은 '관계' 상황에선 순응이 맞습니다. 같은 사람이라도 칸이 바뀌면 정답이 뒤집힙니다.

학원 상담실에 이 격자를 얹어보면 풍경이 달라집니다. 첫 상담을 온 학부모와, 3년째 다닌 학생의 재등록을 의논하는 학부모는 같은 칸에 있지 않습니다. 앞쪽은 관계가 아직 얕고 조건을 따지는 '거래'에 가깝고, 뒤쪽은 신뢰가 쌓인 '관계'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두 자리에서 같은 화법을 썼습니다. 재등록 학부모에게도 신규 상담처럼 우리 학원의 강점을 줄줄이 설명했던 겁니다. 셸의 격자로 보니, 그건 이미 관계가 된 분에게 거래의 언어를 쓴 것이었습니다. 멘트가 틀린 게 아니라, 칸을 잘못 읽은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제 십몇 년의 관찰 하나를 덧붙입니다. 등록을 가장 망설이는 학부모일수록, 사실은 가격을 묻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분들이 진짜 협상하던 상대는 제가 아니라 집에 있는 배우자, 혹은 아이 본인이었습니다. 셸은 이걸 '상대의 이해관계'와 '테이블 밖 결정권자'로 설명합니다. 숙련된 협상가는 공통 기반을 찾는 데 보통 사람보다 네 배의 시간을 쓴다는 연구를 그는 인용합니다. 상담을 끝낸 뒤 "오늘 결정하셔야 합니다"라고 밀어붙이는 대신, "집에 가서 누구와 의논하시면 좋을까요"라고 물은 날의 등록률이 더 높았던 이유를, 저는 이 책을 읽고서야 언어로 설명할 수 있게 됐습니다.

물론 한계도 있습니다. 이 책은 두껍고, 영어 원서는 사례가 미국 비즈니스 현장에 쏠려 있습니다. JP모건과 RJR 나비스코 이야기가 학원 상담실로 곧장 번역되지는 않습니다. 통합 골격이 정교한 만큼, 표를 외우려 들면 오히려 셸이 경계한 '공식 외우기'의 함정에 빠지기 쉽습니다. 이 책은 빠르게 써먹는 매뉴얼이 아니라, 천천히 자기 진단 습관을 들이는 책입니다.

그럼에도 제게 남은 건 한 문장이었습니다. 결과만 보면 등록은 다 같은 등록인데, 왜 그 학부모가 마음을 정했는지를 파고들면 한 명도 같지 않았습니다. 어떤 분은 옆집 엄마의 한마디 때문에, 어떤 분은 아이의 표정 하나 때문에 결심했습니다. 그동안 저는 그 모두에게 같은 자물쇠를 들이밀고 안 열린다고 제 손을 탓했던 겁니다. 셸을 덮고 나서, 저는 상담 노트에 멘트 대신 칸을 적기 시작했습니다. 이 학부모는 지금 어느 칸에 서 있는가. 그 한 줄을 적는 데 익숙해지자, 다음 상담에서 처음으로 입을 떼기 전에 한 박자를 쉬게 됐습니다.


Bargaining for Advantage / Bargaining for Advantage: Negotiation Strategies for Reasonable People / G. Richard Shell 저 / Penguin Books /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