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YWIKI
← 칼럼
독서노트북노트2026.06.1610분 읽기

배짱이 생긴 뒤에 당당해지는 게 아니라, 간절함을 다스리는 연습을 한 번 해본 뒤에 배짱이 따라오는 겁니다.

상담실 문이 닫히고, 학부모가 의자에 앉았습니다. 원장님은 준비한 자료를 펼치다가, 손이 미세하게 멈추는 순간을 봤습니다. 학부모가 가방에서 다른 학원 안내문을 꺼내 책상에 올려놓았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부터 상담의 공기가 바뀌었습니다. 원장님은 더 친절해졌고, 말이 빨라졌고, 묻지도 않은 할인 이야기를 먼저 꺼냈습니다. 등록은 됐습니다. 그런데 상담실을 나오는 원장님의 표정이 이긴 사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 표정을 압니다. 제 표정이기도 했으니까요.

오랫동안 저는 그것이 성격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소심해서 끌려간다, 배짱이 없어서 먼저 숙인다. 협상 책을 집어 든 이유도 그거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더 당당해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안 흔들릴 수 있을까. 류재언 변호사의 협상 바이블과 하버드 협상 강의를 먼저 읽었습니다. 두 책은 훌륭했습니다. 원칙이 있고, 절차가 있고, BATNA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제가 상담실에서 무너지는 순간을 설명해주지는 못했습니다.

허브 코헨의 이 1980년 책을 펼친 건 그다음이었습니다. 협상 대중서의 원조 격인 이 책에서, 저는 당당해지는 법을 찾을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코헨이 들이민 건 정반대의 문장이었습니다.

"Care, but not THAT much." 신경 쓰되, 그렇게까지는 말라.

코헨은 협상이 원칙이나 화술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가 정리한 협상의 본질은 단 세 변수입니다. 힘(Power), 시간(Time), 정보(Information). 모든 협상에서 우리는 늘 상대가 나보다 힘이 세 보이고, 상대는 시간에 쫓기지 않아 보이고, 상대가 나를 더 많이 아는 것 같다고 느낍니다. 이 세 가지 착시가 우리를 끌려가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중 코헨이 가장 깊이 파고든 것이 힘입니다.

여기서 이 책의 숨은 한 수가 나옵니다. 코헨은 힘이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 인식이라고 못 박습니다. 가졌다고 믿으면 가진 것이고, 없다고 믿으면 없는 것입니다. 그가 든 예가 인상적입니다. 감옥에 갇힌 죄수에게도 말보로 담배 한 갑이 있으면 협상력이 생깁니다. 담배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가졌다는 인식이 판을 바꾸기 때문입니다. 류재언과 하버드가 "협상 테이블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가르친다면, 코헨은 그 한 칸 앞으로 들어갑니다. "테이블에 앉기도 전에, 당신은 이미 자신의 힘을 얼마로 매기고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왜 자신의 힘을 자꾸 깎아내릴까요. 코헨의 답이 바로 그 간절함입니다. 너무 갖고 싶으면, 너무 놓치기 싫으면, 사람은 자기 힘을 스스로 0으로 만듭니다. 코헨이 든 스미스 씨 이야기가 그렇습니다. 꿈에 그리던 집을 만난 스미스는 그 집을 너무 원한 나머지 부르는 값 15만 달러를 그대로 다 냈습니다. 깎을 수 있었는데, 깎지 않은 게 아니라 깎을 마음 자체가 사라진 겁니다. 간절함이 그의 힘을 녹여버린 것이죠.

이 대목에서 저는 책을 덮고 한참을 앉아 있었습니다. 제가 상담실에서 흔들렸던 건 소심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 학생을, 그 등록을 너무 간절히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학부모는 그 간절함을 정확히 읽어냅니다. 사람은 말보다 공기를 먼저 읽으니까요.

여기서 원장님께 가장 크게 닿을 재구성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학원 상담을 '설득'이라고 부릅니다. 내가 가진 좋은 것을 어떻게든 상대에게 납득시키는 일이라고요. 그런데 코헨의 렌즈로 보면 상담은 설득이 아니라 힘·시간·정보가 오가는 협상의 그물망입니다. 그리고 이 그물망에서 가장 크게 흔들리는 변수는 학부모가 아니라 원장 자신의 간절함입니다. 다시 말해, 상담의 주도권은 더 좋은 커리큘럼에서 오지 않습니다. 이 등록이 안 돼도 나는 괜찮다는 마음의 여백에서 옵니다. 자리가 비어 있어도 견딜 수 있는 학원이, 역설적으로 자리를 채웁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코헨이 말하는 건 무관심이 아닙니다. 그가 쓴 단어는 분명 'Care'입니다. 신경은 쓰되, 그 신경이 나를 집어삼키게 두지 말라는 겁니다. 협상을 인생을 건 전쟁이 아니라 한 판의 게임처럼 대하라는 것이죠. 이 미묘한 균형이 이 책의 진짜 어려움이고, 동시에 진짜 가치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의 그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소심한 사람도 도전한다, 용감해서가 아니라 두려우면서도 한 걸음 내딛는 것이다. 코헨을 읽고 나서야 그 문장을 다시 이해했습니다. 상담에서 당당해지는 길은 두려움을 없애는 게 아니었습니다. 두려운 채로, 간절한 채로, 그 간절함을 한 발짝 옆에 내려놓고 한 걸음 내딛는 것. 배짱이 생긴 뒤에 당당해지는 게 아니라, 간절함을 다스리는 연습을 한 번 해본 뒤에 배짱이 따라오는 겁니다.

이 책에는 시간 변수와 정보 변수, 그리고 간파되면 무력해지는 여섯 가지 강압 전술 이야기도 있습니다. 데드라인은 왜 늘 양보를 끌어내는지, 왜 정보는 협상 테이블에 앉기 한참 전에 모아야 하는지. 다만 그건 각자의 상담실에서 직접 만나시는 게 좋겠습니다. 1980년 냉전기에 쓰인 책이라 '소련식 협상' 같은 시대의 흔적이 군데군데 묻어 있고, 일화가 다소 과장된 대목도 있습니다. 그 거친 질감을 감안하고 읽으면, 오히려 40년이 지나도 닳지 않는 알맹이가 또렷하게 보입니다.

저는 이 책을 덮고 다음 상담 전에 딱 한 가지를 바꿔봤습니다. 상담실에 들어가기 전, 속으로 한 문장을 외웠습니다. "이 등록이 안 돼도 나는 괜찮다." 거짓말처럼 들리겠지만, 그 한 문장을 외운 날의 상담은 달랐습니다. 제 말이 느려졌고, 먼저 할인을 꺼내지 않았고, 침묵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달라진 건 제 화술이 아니라 제 간절함의 온도였습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저는, 소심하다는 말을 제 자신에게 쓰지 않게 됐습니다.


협상의 법칙 / You Can Negotiate Anything / 허브 코헨 저 / Citadel Press / 19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