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한 원장님이 뿌듯한 얼굴로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상담 문의 응대를 자동화했다는 겁니다. 밤 열한 시에 오는 문의에도 챗봇이 즉시 답하고, 안내 문자도 버튼 한 번이면 나갑니다. "이제 저녁이 있는 삶이 생겼어요." 저는 진심으로 축하드렸습니다.
그런데 석 달쯤 뒤, 같은 원장님이 조금 다른 얼굴로 오셨습니다. "재등록 상담이 예전 같지 않아요. 학부모님들이 좀… 사무적이에요." 무엇이 달라졌냐고 여쭤보니, 딱 짚지는 못하셨습니다. 다 편해졌는데, 어딘가 얇아진 느낌. 그리고 곧바로 자책이 따라왔습니다. "제가 뭘 잘못한 걸까요."
여러분이라면 그 자리에서 뭐라고 답하시겠습니까. 저는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잘못하신 게 아닙니다. 청구서가 안 오는 비용을 치르셨을 뿐입니다.
편리는 왜 늘 '옳은 선택'처럼 보일까
먼저 짚고 싶은 게 있습니다. 우리는 왜 편리 앞에서는 거의 고민하지 않을까요.
무언가를 편하게 바꾸면, 좋은 점은 그 자리에서 눈에 보입니다. 시간이 줄고, 손이 덜 가고, 저녁이 생깁니다. 장부의 '이득' 칸이 선명하게 채워집니다. 그런데 그 대가로 치른 것 — 사라진 정성, 얇아진 관계 — 은 청구서가 날아오지 않습니다. 통장에서 얼마가 빠져나갔다는 알림이 안 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득만 보고, 비용은 못 본 채로 결정합니다.
철학 저술가 톰 채트필드는 이걸 심리학의 '감정 휴리스틱'으로 설명합니다. (쉽게 말하면, 판단이 어려울 때 우리 머리가 감정에게 결정을 떠넘기는 지름길입니다.) 이 지름길에 올라타면 세상이 이렇게 보입니다. "좋은 기술은 비용이 거의 없고, 모든 결정이 쉽다." 새 도구 앞에서 우리는 이득은 또렷하게 상상하고, 비용은 흐릿하게 지웁니다. 이건 우리가 셈이 어두워서가 아니라, 애초에 장부 한쪽 칸이 비어 있도록 설계돼 있기 때문입니다.
편지에 향을 입히던 시절
그 비어 있는 칸에 이름을 붙인 사람이 있습니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를 쓴 여행 작가 에릭 와이너는 천 년 전 일본 헤이안 궁정의 편지 문화를 들여다봅니다. 그 시절 편지 한 통을 보내는 일은 지금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 전혀 달랐습니다. 종이의 결을 고르고, 글씨를 다듬고, 계절에 맞는 향(香)까지 입혔습니다. 편지 자체가 하나의 예술이자, 그 사람을 향한 마음의 부피였습니다.
오늘의 이메일은 그 수고를 전부 없앴습니다. 클릭 한 번이면 갑니다. 빠르고 편합니다. 그런데 향이 없습니다. 정성의 흔적도 없습니다. 와이너는 이 사라진 것 — 잃어버린 친밀함과 아름다움 — 을 편리함이 물리는 세금이라 부르며 '편리세(便利稅)'라 이름 붙입니다. 편리는 공짜가 아니라, 우리가 낸 줄도 모르는 세금을 걷어간다는 겁니다.
여기서 저는 그 원장님의 재등록 상담이 떠올랐습니다. 자동 문자와 챗봇은 향을 뺀 이메일과 정확히 같은 자리에 있었습니다. 문의에 즉시 답이 갔지만, 밤늦게 원장이 직접 눌러 쓰던 문자 한 줄이 품고 있던 '정성껏 챙겨주는 느낌'은 함께 빠져나갔습니다. 학부모가 "사무적이다"라고 느낀 건 서비스가 나빠져서가 아닙니다. 편리세를 낸 겁니다. 다만 아무도 그 청구서를 보내지 않았을 뿐이죠.
그렇다고 다 껴안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럼 불편을 다 되살려야 할까요. 손편지를 다시 쓰고, 자동화를 전부 걷어내야 할까요. 저는 그건 정반대의 함정이라고 봅니다.
행동경제학에는 '슬러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진창, 진흙탕이라는 뜻입니다.) 리처드 탈러 같은 행동경제학자들이 짚은 개념인데, 사람을 괴롭히기만 하는 쓸데없는 마찰을 가리킵니다. 환불하려는데 전화를 세 번 돌려야 하는 절차, 해지하려는데 일부러 숨겨둔 버튼 같은 것들이요. 이런 불편은 아무것도 키우지 않습니다. 그냥 사람을 지치게 할 뿐입니다. 이런 건 없애는 게 맞습니다. 망설일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진짜 물음은 '편리냐 불편이냐'가 아니었습니다. 어떤 불편은 지워야 할 잡초고, 어떤 불편은 남겨야 할 밭입니다. 문제는 이 둘을 가려내지 못하고 한꺼번에 밀어버릴 때 생깁니다. 그 원장님은 슬러지(잡초)를 지우려다, 관계를 키우던 밭까지 함께 갈아엎은 겁니다.
밭이냐 잡초냐 — 두 개의 물음으로 가르기
이제 그 가려내기를 원장님 책상 위로 올려보겠습니다. 저는 어떤 불편(마찰)을 만나면 두 가지를 물어봅니다.
첫째, 이걸 없애면 사람이 실제로 편해지는가. 둘째, 이 불편이 사고·관계·성장을 키우던 밭인가. 이 두 물음을 겹치면 네 칸이 나옵니다.
| 없애도 별로 안 편함 | 없애면 크게 편함 | |
|---|---|---|
| 밭이다 (관계·성장을 키움) | ① 오히려 일부러 남겨라 | ② 진짜 판단 지점 — 편리세 최대 |
| 밭이 아니다 (그냥 장애물) | ③ 신경 안 써도 됨 | ④ 지워라 (슬러지) |
가장 조심할 칸은 ②입니다. 없애면 확 편해지니까 지우고 싶은데, 바로 그 편함 뒤에 가장 큰 편리세가 숨어 있습니다. 그 원장님의 재등록 상담이 딱 ②였습니다. 자동화하면 편하지만, 그 안에서 관계가 자라고 있었으니까요. 반대로 환불·문의 절차의 번거로움은 ④, 슬러지입니다. 그건 지우는 게 맞습니다.
'불편은 다 없애라'는 쪽은 ②와 ④를 구별하지 못하고 둘 다 지웁니다. 옛것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①과 ④를 구별하지 못하고 둘 다 껴안습니다. 이 표의 값어치는 딱 하나, 네 칸을 나눈다는 데 있습니다. 종이 한 장에 그려두고, 무언가를 편하게 바꾸기 전에 "이건 몇 번 칸이지?"만 물어도 충분합니다.
그래서 이번 주에 해볼 수 있는 것
여기까지 읽으시고 "그래서 당장 뭘 하라는 건가" 싶으실 겁니다. 세 가지만 남겨드리겠습니다.
하나, 편리하게 바꿀 때마다 한 줄을 적어보십시오. "이걸로 무엇을 얻고, 그 대가로 무엇을 내는가." 이득만 적히던 장부에 비용 칸을 억지로 여는 겁니다. 이 한 줄이 ②를 ④로 착각하는 걸 막아줍니다.
둘, 새 도구를 '다들 쓰니까' 들이지 마십시오. 채트필드가 소개하는 미국의 아미시 공동체는 새 기술을 이렇게 들입니다. 누군가 가져오면, 한 사람을 시험자로 정하고, 한동안 지켜보고 보고받은 뒤, 충분한 이득이 없으면 안 들입니다. 학원으로 옮기면 이렇습니다. 새 자동화 도구가 생기면 전면 도입 전에 한 반, 한 강사만 먼저 한 달 써보고 "재등록이나 신뢰가 실제로 나아졌나"를 보고 결정하는 겁니다. 감정에게 판단을 떠넘기는 그 지름길을 조직적으로 막는 장치죠.
셋, 남기기로 한 밭에는 일부러 수고를 심으십시오. 자동 문자가 나가는 그 지점에, 원장님이 직접 쓴 한 줄을 한 주에 몇 번만 끼워 넣어도 됩니다. 편리를 다 거두는 게 아니라, 관계가 자라던 자리에만 정성의 향을 남기는 겁니다.
편리는 나쁜 게 아닙니다. 다만 편리는 늘 이득만 내밀고 비용은 감춥니다. 그러니 매끄럽게 바꾸기 전에 딱 한 번만 멈춰서 물어봐 주십시오. 이 매끄러움은 무엇을 지우고 있는가. 청구서가 오지 않는 비용은, 공짜가 아니라 그저 보이지 않는 값이다. 그 값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 편리는 다시 원장님이 '고르는' 것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