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YWIKI
← 칼럼
칼럼콘텐츠·브랜딩·미디어2026.06.2413분 읽기


원장님 한 분이 빈 화면을 한 시간 동안 노려보다 저에게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쓸 말은 머릿속에 가득한데, 막상 손을 대면 한 줄도 안 나가요." 그분은 학부모에게 하고 싶은 말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이 동네에서 조급함에 떠밀리지 않고 자랐으면 좋겠다는, 꽤 단단한 마음이었죠. 그런데 그 마음이 글이 되는 순간 신기하게 사라졌습니다. 쓰면 하소연이 되고, 다시 쓰면 자랑이 되고, 또 쓰면 정보 나열로 끝나버렸습니다.

저는 이런 메시지를 한 달에도 몇 번씩 받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같은 오해를 마주합니다. "제가 글재주가 없어서요."

글 막힘은 재주 문제가 아닙니다

저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글이 안 써지는 건 원장님이 재주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할 말이 머릿속에 가득하다는 건, 재료가 부족한 게 아니라 오히려 넘친다는 뜻이니까요. 진짜 문제는 그 넘치는 한 덩어리를 어떻게 가르고 어떻게 쌓을지, 그 설계도가 없다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좋은 식재료가 냉장고에 가득한데 요리가 안 나오는 집이 있습니다. 재료가 없어서가 아니라 레시피가 없어서입니다. 무엇을 먼저 볶고, 무엇을 따로 끓이고, 마지막에 무엇을 얹을지 순서를 모르면, 좋은 재료가 한 냄비에 다 들어가 정체 모를 잡탕이 됩니다. 글이 하소연도 자랑도 정보도 아닌 어정쩡한 무언가가 되는 게 정확히 이겁니다. 한 편에 다 욱여넣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글이 막혔다는 분께 절대 "더 노력해서 써보세요"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더 노려본다고 빈 화면이 채워지지 않습니다. 대신 묻습니다. "지금 어느 층에서 막히셨어요?"

글에는 척추가 먼저 서야 합니다

제가 한동안 코드를 다루는 분들의 일하는 방식을 들여다본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디버깅'이라는 말을 배웠습니다. 쉽게 말하면 프로그램이 멈췄을 때 고장 난 곳을 찾는 일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일 잘하는 분들은 멈춘 화면을 무작정 노려보지 않더군요. 먼저 묻습니다. "이게 입력 단계에서 깨진 건가, 계산 단계에서 깨진 건가, 출력 단계에서 깨진 건가." 층을 나눠 어디가 비었는지부터 찾고, 그 다음에 그 한 층만 들여다봅니다.

저는 여기서 무릎을 쳤습니다. 글이 막히는 것도 똑같았기 때문입니다. "글이 안 써진다"는 한 덩어리 답답함을 그대로 붙잡고 씨름하니까 안 풀리는 거였습니다. 글에도 층이 있고, 막힌 건 글 전체가 아니라 그중 한 층이더군요. 저는 그 층을 넷으로 나눕니다.

첫째 층은 방향입니다. 글에는 척추가 있어야 합니다. 그 척추는 거창한 주제가 아니라 '바램' 한 문장입니다. "이 동네 분위기가 답답하다"는 감정을 그대로 쏟으면 하소연이 됩니다. 그런데 그 답답함 밑에 깔린 바램을 한 문장으로 뽑으면 달라집니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남과 비교당하지 않고 자기 속도로 자라길 바란다." 이 문장을 글의 첫머리와 끝에 걸어두면, 가운데 무슨 이야기를 하든 글이 한 방향을 봅니다. 척추가 선 겁니다.

한 덩어리를 셋으로 가르면 글이 늘어납니다

둘째 층은 구조입니다. 여기서 대부분의 글이 무너집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으니까 문제도 던지고, 답도 주고, 사례도 넣고, 다 한 편에 담습니다. 그러면 어느 것도 깊어지지 않습니다.

저는 한 덩어리를 세 글로 가르라고 말씀드립니다. 하나는 문제만 던지는 글입니다. "왜 우리 동네 아이들은 초등학교 4학년부터 표정이 굳을까요"라고 상황만 펼치고, 답은 일부러 함구합니다. 다음 글은 그 답을 따로 다루는 글입니다. 또 다음 글은 한 아이의 이야기로 마음을 건드리는 글입니다. 문제 글에서 답을 아낀 그 미해결이, 독자를 다음 글로 데려가는 다리가 됩니다.

여기서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한 덩어리 감정을 한 편에 다 쏟으면 글 한 편으로 소진되고 맙니다. 그런데 세 역할로 가르면 같은 감정이 세 편으로 늘어납니다. 감정은 글감이 부족할 때 막다른 골목이 아니라, 오히려 여러 편이 자라나는 씨앗이었던 겁니다. "쓸 게 없다"는 분들 대부분은 글감이 없는 게 아니라, 하나의 감정을 한 편으로 다 써버릴 생각만 하고 계신 거였습니다.

'결과'와 '사람'은 다른 층입니다

셋째 층, 인물입니다. 저는 이 층을 가장 좋아합니다. 여기에 글이 자랑이 되느냐 이야기가 되느냐의 갈림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후기를 못 올리겠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쓰면 자랑 같아서요." 그 마음 이해합니다. 그런데 후기가 자랑이 되는 데는 정확한 이유가 있습니다. 결과만 적기 때문입니다. "우리 학원 다니고 성적이 30점 올랐습니다." 이건 누구나 쓸 수 있고, 그래서 옆 학원 후기와 똑같습니다. 결과는 복사가 됩니다.

제가 예전에 자기소개서 쓰는 분들을 여럿 곁에서 도운 적이 있습니다. 인턴도 했고, 학점도 좋고, 수상 경력도 화려한데, 정작 왜 그게 자기 이야기인지는 설명하지 못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그 일에 지원하셨어요"를 한 겹 파고들면, 거기서 전혀 다른 사람이 걸어 나왔습니다. 결과만 보면 비슷한 사람들이, 그 '왜'를 파면 전부 달랐습니다. 그 '왜'가 그 사람만의 것이었던 겁니다.

글도 똑같습니다. 한 아이의 성적이 올랐다는 결과 밑에, "그 아이가 어떤 사람이 되었나"를 한 층 더 깔아야 합니다. 시험을 포기하던 아이가 처음으로 "한 번 더 풀어볼게요"라고 말한 그 장면. 성적은 결과지만, 그 한 마디는 그 아이가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결과는 옆 학원도 가질 수 있지만, 그 변화의 장면은 원장님만 본 겁니다. 결과와 사람은 같은 층이 아닙니다. 자랑과 이야기를 가르는 건 글솜씨가 아니라, 결과 아래에 사람을 한 층 더 까느냐 마느냐입니다.

논리로 밀지 말고, 깨달은 장면으로 여세요

넷째 층은 전달입니다. 이건 따로 떨어진 한 층이라기보다, 앞의 세 층 전체에 흐르는 결입니다. 핵심은 하나입니다. 글을 주장으로 열지 말고, 내가 깨달은 장면으로 여는 것.

사람은 논리로 설득되지 않습니다. 먼저 마음이 열리고, 그 다음에 논리로 자기를 정당화합니다. 그래서 첫 문장이 "요즘 사교육의 문제는 세 가지입니다" 같은 주장이면, 독자의 방어막이 먼저 올라갑니다. 대신 "초등학교 4학년 아이가 시험지를 받자마자 한숨부터 쉬더군요"라고 장면으로 열면, 독자는 어느새 그 교실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어려운 말은 초등학교 3학년도 알아들을 만큼 낮추고, 낯선 개념은 "일종의 척추 같은 거예요"처럼 일상의 무언가에 빗대면 됩니다.

그래서, 막힌 화면을 노려보지 마세요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글은 한 덩어리 감정을 네 층으로 짓는 일입니다. 방향으로 척추를 세우고, 구조로 한 덩어리를 셋으로 가르고, 인물로 결과 아래 사람을 깔고, 전달로 주장 대신 장면을 엽니다.

이 글을 읽고 나면 원장님은 한 가지 렌즈를 갖게 되십니다. 다음에 글이 안 써질 때, 자신을 탓하는 대신 이렇게 물으시면 됩니다. "나는 지금 네 층 중 어디가 비어서 막힌 걸까." 방향이 없으면 하소연이 되고, 구조가 없으면 한 편에 다 욱여넣게 되고, 인물의 속이 없으면 자랑이 되고, 전달의 결이 없으면 논리 폭격이 됩니다. 막힌 자리를 정확히 짚을 수 있으면, 거기 한 층만 채우면 됩니다.

재미있는 건, 지금 읽으신 이 글 자체가 그 증거라는 점입니다. "글이 안 써진다"는 막연한 감정 하나를, 저는 방향과 구조와 인물과 전달이라는 네 개의 칸으로 갈라 한 편으로 세웠습니다. 그리고 방향·구조·인물·전달 각각은, 마음만 먹으면 다시 한 편씩 떼어내 따로 쓸 수 있습니다. 한 덩어리가 다섯 편이 되는 거죠.

글은 재주가 없어서 막히는 게 아니라, 설계가 빠져서 막힙니다. 막힌 곳을 노려보지 마세요. 어느 층이 비었는지부터 찾으세요.

이 칼럼은 콘텐츠·브랜딩·미디어 분야를 보면서 정리한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