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어떤 분이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요즘 AI가 다 해주잖아요. 그러면 저는 이제 뭘 해야 하죠?" 농담처럼 웃으며 한 말이었는데, 그 뒤에 깔린 표정은 농담이 아니었습니다. 일을 빼앗기는 게 아니라, 자기 자리가 어디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습니다.
저는 그 표정을 압니다. 가르치는 게 좋아서 학원을 시작했는데, 학원이 커질수록 직접 가르치는 시간이 줄어드는 원장님의 얼굴이 딱 그랬으니까요. 좋아하는 걸 손에서 놓는 것 같은 기분. 내가 점점 쓸모없어지는 것 같은 기분.
그런데 저는 요즘 그 불안이 사실은 한 가지 질문을 안 던져봐서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AI에게 무엇을 넘기고, 무엇을 끝까지 내가 쥐어야 하는가. 이 선을 한 번도 그어본 적이 없으면, 일을 넘기는 모든 순간이 다 자리를 빼앗기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선을 한 번 그어보면, 넘기는 일과 빼앗기는 일은 완전히 다른 일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능력은 옮겨가도, 옮겨가는 데도 순서가 있다
이 선을 어디에 그어야 할지 — 그 단서를 저는 뜻밖의 곳에서 찾았습니다. AI 연구의 한복판에 있는 안드레이 카파시라는 사람의 인터뷰입니다.
그는 오랫동안 코드를 직접 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코드를 거의 안 친다고 합니다. 영어로 말하면, 그러니까 무엇을 만들지 설명하면, 기계가 코드를 채워준다는 겁니다. 능력이 손끝에서 입으로 옮겨간 셈입니다. 코드를 칠 줄 아는 것보다, 무엇을 왜 만들지 말로 설명할 줄 아는 게 더 중요해진 거죠.
여기까지는 흔한 이야기입니다. "이제 다 자동화된다"는 말, 어디서든 듣습니다. 그런데 카파시는 한 칸 더 들어갑니다. 기계가 천재인 곳은 채점되는 곳뿐이라는 겁니다. 정답이 명확해서 맞았는지 틀렸는지 바로 가릴 수 있는 일 — 거기서는 기계가 사람을 압도합니다. 그런데 정답을 자동으로 가릴 수 없는 일, 그 경계로 가면 기계의 능력은 들쭉날쭉해집니다. 화려하게 잘하다가도 1초짜리 당연한 판단을 태연히 틀립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무릎을 쳤습니다. 그러면 다음에 무엇이 자동화될지를 예측하는 잣대가 바뀌기 때문입니다. "이 일이 어려운가 쉬운가"가 아니었습니다. **"이 일은 정답을 자동으로 가릴 수 있는가"**였습니다. 어려워 보여도 채점이 되는 일은 먼저 넘어가고, 쉬워 보여도 채점이 안 되는 일은 끝까지 사람에게 남습니다.
이건 AI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느 분야든 똑같습니다. 객관식 채점, 진도 점검, 계산, 정해진 양식 채우기 — 정답이 또렷한 일은 가장 먼저 기계로 넘어갑니다. 반대로 "이 아이에게 지금 무엇이 왜 필요한가" 같은, 정답을 자동으로 매길 수 없는 판단은 끝까지 사람 손에 남습니다. 그러니 일을 빼앗긴다는 불안의 절반은, 사실 넘어가도 되는 일이 넘어가는 것을 보고 있는 겁니다.
유령을 사람으로 착각하는 순간, 선이 지워진다
넘어가도 되는 일과 남아야 하는 일이 갈린다면, 다음 질문은 이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기계를 무엇으로 대해야 하는가.
카파시는 재미있는 비유를 듭니다. AI는 동물이 아니라 유령이라는 겁니다. 동물은 동기가 있습니다. 배고프면 먹으려 하고, 혼나면 움츠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동물한테 하듯 AI를 다룹니다. "제발 잘해줘", "이번엔 똑바로 해" 하고 사정하거나 다그칩니다. 그런데 유령한테는 그게 안 통합니다. 유령은 동기가 없으니까요. 통계 위에 학습이 얹힌, 동기 없는 존재일 뿐입니다.
이게 왜 중요한지 한 겹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우리가 AI를 '똑똑한 동료'로 의인화하는 순간, 무서운 일이 벌어집니다. "이 친구 똑똑하니까 알아서 잘하겠지" 하고 판단을 통째로 넘겨버리는 겁니다. 매끄럽게 술술 답하니까, 이해까지 다 한 줄 알고 운전대를 통째로 맡깁니다. 그런데 유령은 유저 아이디는 고유해야 한다 같은, 인간이라면 1초도 고민 안 할 당연한 판단을 천연덕스럽게 틀립니다.
학원으로 한 번만 옮겨와 보겠습니다. AI 상담봇이 학부모 문의에 매끄럽게 답한다고 칩시다. 말투도 친절하고 정보도 정확합니다. 여기서 "그럼 학부모 상담을 통째로 맡겨도 되겠네"로 넘어가는 순간, 그게 함정입니다. 어떤 학부모는 지금 성적 이야기를 하러 온 게 아니라 불안을 달래러 온 겁니다. "이 집은 지금 점수가 아니라 마음을 봐야 한다"는 1초짜리 판단 — 유령은 이걸 태연히 놓칩니다. 의인화가 다정해 보일수록, 넘기면 안 되는 것까지 넘기게 됩니다.
손을 떼는 것과 자리를 지키는 것은 다른 일이다
그렇다면 결국 남는 질문은 하나입니다. 그래서 무엇은 넘기고 무엇은 끝까지 쥐어야 하는가.
카파시의 인터뷰 전체를 한 점으로 모으면 한 문장이 남습니다. 싱킹은 위임할 수 있어도, 언더스탠딩은 위임할 수 없다. 우리말로 풀면 이렇습니다. 분석하고 처리하고 실행하는 일 — 그러니까 '생각의 노동'은 기계에 넘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왜 만들지, 그게 맞는지 어떻게 검증할지를 내 머릿속에서 연결해 깨닫는 일 — 그러니까 '이해'는 끝까지 넘길 수 없습니다.
여기서 직관에 반하는 결론이 나옵니다. 보통은 "AI가 일을 많이 해주면 내가 할 게 줄어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거꾸로입니다. AI가 더 많이 해줄수록, 내가 남겨 쥐는 한 줌은 더 적어지지만 더 무거워집니다. 코드 치는 일, 자료 외우는 일, 초안 쓰는 일은 다 넘어갑니다. 그러고 나면 남는 건 '무엇을 왜 할지'와 '이게 맞는지 어떻게 가릴지'를 내 모델 위에서 결정하는 이해뿐입니다. 그 한 줌이 비면 위임 전체가 무너집니다. 결과는 산더미인데 그게 맞는지 틀린지 판단할 수가 없어지니까요.
저는 이 지점에서 처음 그 원장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가르치는 걸 손에서 놓는 것 같아 괴로워하던 그 표정. 그런데 그분은 좋아하는 걸 포기한 게 아니었습니다. 수업이라는 '실행'을 강사에게 넘기고, 무엇을 왜 가르칠지를 설계하는 '이해'의 자리로 올라간 겁니다. 손을 뗀 것과 자리를 지킨 것은 다른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건 지금 우리가 AI 앞에서 겪는 일과 정확히 같은 일입니다.
그러니 "AI가 다 하면 나는 뭘 하지"라는 불안에 저는 이렇게 답하고 싶습니다. 당신이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당신이 있어야 할 자리가 위로 한 칸 올라간 겁니다. 손끝의 일을 넘긴 자리에, 무엇을 왜 할지 판단하는 더 무거운 자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일 무엇을 다르게 할 것인가
여기까지 왔으면 좌표는 그려졌습니다. 이제 그 좌표를 실제 책상 위에서 어떻게 쓰는지로 닫겠습니다.
오늘 AI에게 일을 시킬 때, 딱 두 가지만 자문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첫째, 이 일은 정답을 자동으로 가릴 수 있는 일인가. 그렇다면 마음 놓고 넘기십시오. 거기서는 기계가 천재입니다. 둘째, 이 일은 무엇을 왜 하느냐의 판단이 들어가는 일인가. 그렇다면 결과가 아무리 매끄러워도, 내가 그 이유를 따라갈 수 있는지 직접 확인하십시오. 매끄러움은 이해의 증거가 아니라 이해의 인상일 뿐입니다.
가장 위험한 건 이 둘을 헷갈리는 순간입니다. 판단이 들어가는 일을 단순 처리인 척 통째로 넘기고는, 넘긴 줄도 모르는 상태. AI 시대의 실패는 위임을 안 해서가 아니라, 넘기면 안 되는 것까지 넘긴 줄도 모르고 넘겨서 생깁니다.
그래서 저는 카파시의 작업법 한 가지를 따라 하고 있습니다. 그는 읽은 글을 자기 위키에 차곡차곡 쌓고, 거기에 질문을 던지며 이해를 키운다고 합니다. 분석은 기계에 넘기되, 그게 내 머릿속에서 연결되어 깨달음이 되는 과정만큼은 직접 손으로 한다는 겁니다. 사실 이 글을 쓰는 저의 작업, 이 볼트가 하는 일이 정확히 그것입니다.
위임의 시대에 가장 강한 사람은 가장 많이 넘기는 사람이 아닙니다. 무엇을 넘기고 무엇을 쥘지 그 선을 또렷이 아는 사람입니다. 싱킹은 기계에 넘기십시오. 언더스탠딩은, 끝까지 당신이 기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