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YWIKI
← 칼럼
독서노트독서노트2026.06.1610분 읽기

상담 테이블에서 우리가 마주 앉은 건 학부모가 아니라 문제입니다.

상담실에서 학부모가 "조금만 더 깎아주시면 등록할게요"라고 했을 때, 저는 늘 두 갈래 길 앞에 섰습니다. 깎아주면 손해 보는 것 같고, 안 깎아주면 놓칠 것 같고. 그 사이에서 매번 졌습니다. 깎아주면 "역시 부르는 게 값이었네" 하는 표정이 돌아왔고, 안 깎아주면 그분은 옆 학원으로 갔습니다. 어느 쪽이든 제가 진 기분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저는 이걸 제 말솜씨 탓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말 잘하는 원장님들은 이런 자리에서 능수능란하게 받아치던데, 나는 왜 이렇게 매번 끌려다닐까. 협상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떠오르는 건 늘 그 장면이었습니다. 누가 더 세게 부르고, 누가 더 안 물러서느냐. 기싸움. 그래서 저는 협상을 잘하는 법을 배우면 더 안 깎아주고 버티는 법을 배우게 될 줄 알았습니다.

이 책을 집은 것도 그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협상서 네 권을 묶어 읽던 중 두 번째로 펼친 책이었고, 류재언 변호사의 한국형 실무서를 먼저 본 터라 그 원형이 궁금했습니다. 하버드라는 이름이 붙었으니 더 정교한 밀당 기술이 있겠거니 했습니다. 그런데 책이 첫 장부터 제 기대를 빗나가게 했습니다.

이 책의 골격은 하버드 협상 프로젝트, 로저 피셔와 윌리엄 유리가 쓴 『Getting to Yes』에서 왔습니다. 책 한 권이 한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게 아니라, 수십 년간 외교·법률·경영 현장의 협상을 분석해 온 한 학파의 공동 작업이라는 뜻입니다. 그 학파가 도달한 결론을 책은 ICON이라는 네 글자로 묶습니다. 입장이 아니라 이익을 보고(Interests), 윈-윈이 될 여러 대안을 만들고(Option), 감정 대신 객관적 기준으로 판단하고(Criteria), 결렬됐을 때의 최선책(BATNA)을 미리 쥐고 들어가라는 것. 듀폰과 IBM, 캠프데이비드 평화협정, 마쓰시타와 키신저까지 동서양 사례를 끌어다 이 네 기둥을 반복해서 증명합니다.

읽다가 멈춘 곳은 13강이었습니다. 협상(談判)은 변론(辯論)과 다르다는 대목. 변론은 상대의 최저선을 무너뜨려 내가 이기는 게임이고, 협상은 그 최저선을 인정한 채 그 안에서 함께 합의를 찾는 게임이라는 것. 저는 그제야 알았습니다. 제가 상담실에서 했던 건 협상이 아니라 변론이었습니다. 깎아달라는 학부모를 어떻게든 설득해 안 깎고 이기려는 싸움. 이기든 지든 한쪽이 패배자로 끝나는 구조. 그 구조 안에서 제가 매번 진 기분이 들었던 건 당연했습니다. 그 게임은 이겨도 진 게임이었으니까요.

여기서 이 책이 제게 준 가장 큰 선물이 나왔습니다. 책은 입장과 이익을 갈라놓습니다. 학부모가 입에 올린 "5만 원만 깎아달라"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그 밑에 깔린 진짜 욕구, 그러니까 "이 돈을 쓸 가치가 있다는 확신을 갖고 싶다"거나 "남편에게 설명할 명분이 필요하다"는 이익은 따로 있습니다. 입장끼리 부딪치면 5만 원을 두고 둘 중 하나만 이깁니다. 그런데 이익을 보면, 깎지 않고도 그분이 원하던 걸 줄 길이 보입니다. 형제 할인이든, 첫 달 학습 리포트 보장이든, 그분의 진짜 결핍을 메우는 다른 카드 말입니다.

원장님께 이 한 가지만 전하고 싶습니다. 상담 테이블에서 우리가 마주 앉은 건 학부모가 아니라 문제입니다. 학부모를 이겨야 할 상대로 보면 그 자리는 영원히 흥정판이 되고, 깎아주면 호구가 되고 안 깎아주면 매정한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학부모와 내가 같은 편이 되어 "이 아이에게 뭐가 필요한가"라는 문제를 마주 보고 앉으면, 가격은 싸워야 할 전선이 아니라 함께 풀 변수 중 하나가 됩니다. 이 관점 하나가 바뀌면 상담실의 공기가 바뀝니다. 저는 이걸 책에서 읽고서야, 잘 되는 원장님들이 가격을 안 깎고도 계약하는 이유가 말솜씨가 아니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15년간 연간 1000명 가까운 학부모를 만나며 본 게 하나 있습니다. 끝까지 깎아달라고 버티던 분일수록, 막상 등록한 뒤에는 학원을 가장 의심합니다. 가격으로 이긴 자리는 신뢰로 시작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한 푼도 안 깎였는데 활짝 웃으며 나가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자기 진짜 걱정이 해소됐기 때문에 웃는 겁니다. 이 차이를 책은 "협상의 목표는 가격이 아니라 윈-윈"이라는 한 줄로 정리하는데, 저는 이걸 상담실 문 닫히는 표정에서 수백 번 먼저 봤습니다.

이 책에는 BATNA도, 먼저 가격을 말하는 쪽이 진다는 앵커링도, 작게 여러 번 양보하라는 양보의 기술도 있습니다. 다만 그것들은 각자의 상담실에서 읽으면 보이는 것들이라, 여기서 다 풀지 않겠습니다. 솔직히 책의 한계도 있습니다. 이론보다 사례와 일화 중심이라 가볍게 읽히는 대신, 깊이 파고들면 류재언의 실무서나 원전인 『Getting to Yes』를 따로 봐야 할 빈자리가 느껴집니다. 기존 협상서가 대개 "어떻게 더 유리하게 받아낼까"의 기술서라면, 이 책은 그 기술 이전에 "협상이 애초에 이기고 지는 게임이 아니다"라는 관점을 세워주는 입문서입니다. 그래서 협상이라는 단어에 거부감이 있는 분께 첫 책으로 맞습니다.

저는 이 책을 덮으면서, 옆 학원 원장님이 가격을 안 깎고도 계약을 잘 따낸다는 소문에 조바심 냈던 날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분이 무슨 비법을 쥐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따라가야 할 정답 같은 길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없었습니다. 그분은 비법을 쓴 게 아니라, 애초에 다른 게임을 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흥정판에서 이기려고 안간힘 쓴 건 저뿐이었고, 그 철길은 제 머릿속에서만 깔려 있었습니다.

다음 상담에서 저는 처음으로 가격 이야기가 나왔을 때 깎아줄까 말까를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물었습니다. "어머님, 지금 가장 걱정되시는 게 뭐예요?" 그 한 질문이, 흥정을 협상으로 바꿔놓았습니다.


하버드 협상 강의 / 哈佛谈判课 / 하버드 공개강의 연구회 저 / 송은진 역 / 작은우주(북아지트) / 2018